몽골을 이긴 베트남의 저력

 

송정남 -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교수

 

 

jin.gif 베트남은 몽골의 몇 차례 침략을 모두 막아낸 세계 유일의 국가이다. 물론 몽골의 침략을 막아낸 일본, 점성, 자바 등이 있기는 하나 전쟁의 규모 등에서 베트남과는 비교가 안 된다. 예컨대, 몽골의 베트남 침략이 약 84만의 규모로 전 국토에서 전개되었던 것에 비하여 일본 침략은 약 16만 6천의 병력으로 이키(壹岐)를 비롯한 몇 개 섬과 하카타만(博多灣) 등 극히 일부지역에 국한되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전력도 몽골의 베트남 침략군이 몽골·강남군인 것에 비하여 일본 침략군은 극소수 몽골군을 제외한 고려군과 쇠약한 강남군으로 구성되었다.
소국에 불과했던 베트남이 당시 유라시아를 정복했던 몽골의 침략을 막아냈던 것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기적들은 13세기로 그치지 않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도 재현되었다.
대륙을 정복한 몽골의 최종적인 꿈은 해상을 통한 완전한 세계정복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해상진출의 길목에 있는 남송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베트남의 정복이 우선되어야 했다. 이는 베트남이 남송의 침략과 남해진격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즉 남방에 속했던 베트남을 점령함으로써 전투식량과 용병을 획득하고, 특히 몽골의 남방 진출에 있어서 가장 취약했던 부분인 해상제압에 베트남의 뛰어난 수군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몽골은 1258년을 기점으로 1288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베트남을 침략했으나 모두 패했다. 몽골의 패배는 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말할 것도 없었거니와 몽골의 일본 침략을 종결케 하는 주된 요인과 함께 미약하나마 세계사의 흐름에도 영향을 주었다.
30년이란 긴 전쟁 기간은 전력상 절대 열세였던 베트남으로서는 생사를 넘나드는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왕실과 고급관료들 중에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몽골에 항복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왕 스스로도 몽골에 항복의 뜻을 내비쳤다. 이같은 긴장 속에서 항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요인들로는 전술, 심리전, 지형지물, 정책, 외교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본 글에서는 그 중 정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쩐 왕조의 정책 탁월한 전술과 외교역량, 특이한 지형지물, 전민(全民)의 투쟁으로 끌어올린 심리전등과 같이 상대를 능가할 수 있는 요소들이 존재할지라도 이같은 요소들은 운용자의 능력에 따라 명암을 달리 한다. 몽골항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요소는 무엇보다도 쩐 왕조(Tran:陳, 1226~1400)의 정치, 사회의 안정과 이같은 요소들을 창출하고 운용 할 수 있었던 정책능력에 있었다.
왕조의 생성과정, 리왕조(Ly:李, 1009~1225) 말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의 혼란에서 비롯된 내란을 평정하고 여기에 리씨는 물론 리씨의 추종세력들로 비롯될 수 있는 왕조의 우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취했던 일련의 조치들로 인하여, 쩐 왕조 초에는 총체적인 인민의 화합을 끌어내는 데 있어 크게 불리했다. 나아가 남송의 건재가쩐 왕조의 강력한 중앙집권제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할지라도 남송이 갈수록 쇠퇴기에 접어들고, 반면 몽골의 유라시아 지역으로의 세력 확장은 쩐 왕조의 안정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이 같은 내외적인 불안요인들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쩐 왕조의 정책은 추진되었다.
쩐 왕조의 정책은 무엇보다 강력한 군사력과 엄한 법률을 기반으로 했다. 그것은 쩐씨가 군사적인 힘을 바탕으로 정권을 창출했던 배경과 맥을 같이 하며, 여기에 몽골의 위협은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요인이 되어 쩐 왕조의 중앙집권화를 한층 강화하는 기능을 했다. 내외적인 불안요소를 극복하여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에서 자행되었을 리씨 자손의 소멸이 정치, 군사면에 공백을 초래하자, 쩐 왕조는
이를 자신의 추종자들로 메우고 이들에게 권력과 토지와 사병 소유권을 주어 충성을 요구했다. 따라서 쩐 왕조가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왕후와 왕권간 이와 잇몸의 관계에서 가능했다.
쩐씨가 리씨를 멸족시키면서까지 중앙집권화에 전력을 다했다 할지라도 리 왕조의 연속성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것은 쩐씨가 리 왕조 말의 국내의 핵심적인 불안요인을 단지 리씨와 그의 추종자들로 한정함으로써 이전 왕조들의 전통을 잇고 있는 리 왕조를 쩐씨가 다시 잇는다는 차원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쩐 왕조는 리 왕조의 국호를 계승하고, 수도를 탕 롱(Thang Long:昇龍)으로 유지하는 한편 지금까지 정치와 사회적으로 사상은 물론 신앙적 지주가 되어 왔던 불교를 존중했다. 물론 이같은 정책에는 탕 롱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200년 이상을 유지해 왔던 중국 문화를 어부 출신의 토착 세력이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 아니었던가 하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쩐 왕조의 정치형태 중에 두드러진 것이라고 한다면 권력과 경제력, 그리고 군사력을 소유하고 있던 왕후와 공신귀족간의 관계에 있다. 이같은 형태는 이전의 각 왕조에서 속에서 항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요인들로는 전술, 심리전, 지형지물, 정책, 외교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본 글에서는 그 중 정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쩐 왕조의 정책
탁월한 전술과 외교역량, 특이한 지형지물, 전민(全民)의 투쟁으로 끌어올린 심리전등과 같이 상대를 능가할 수 있는 요소들이 존재할지라도 이같은 요소들은 운용자의 능력에 따라 명암을 달리 한다. 몽골항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요소는 무엇보다도 쩐 왕조(Tran:陳, 1226~1400)의 정치, 사회의 안정과 이같은 요소들을 창출하고 운용 할 수 있었던 정책능력에 있었다.
왕조의 생성과정, 리왕조(Ly:李, 1009~1225) 말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의 혼란에서 비롯된 내란을 평정하고 여기에 리씨는 물론 리씨의 추종세력들로 비롯될 수 있는 왕조의 우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취했던 일련의 조치들로 인하여, 쩐 왕조 초에는 총체적인 인민의 화합을 끌어내는 데 있어 크게 불리했다. 나아가 남송의 건재가 쩐 왕조의 강력한 중앙집권제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할지라도 남송이 갈수록 쇠퇴기에 접어들고, 반면 몽골의 유라시아 지역으로의 세력 확장은 쩐 왕조의 안정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이 같은 내외적인 불안요인들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쩐 왕조의 정책은 추진되었다.
쩐 왕조의 정책은 무엇보다 강력한 군사력과 엄한 법률을 기반으로 했다. 그것은 쩐씨가 군사적인 힘을 바탕으로 정권을 창출했던 배경과 맥을 같이 하며, 여기에 몽골의 위협은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요인이 되어 쩐 왕조의 중앙집권화를 한층 강화하는 기능을 했다. 내외적인 불안요소를 극복하여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에서 자행되었을 리씨 자손의 소멸이 정치, 군사면에 공백을 초래하자, 쩐 왕조는 이를 자신의 추종자들로 메우고 이들에게 권력과 토지와 사병 소유권을 주어 충성을 요구했다. 따라서 쩐 왕조가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왕후와 왕권간 이와 잇몸의 관계에서 가능했다.
쩐씨가 리씨를 멸족시키면서까지 중앙집권화에 전력을 다했다 할지라도 리 왕조의 연속성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것은 쩐씨가 리 왕조 말의 국내의 핵심적인 불안요인을
단지 리씨와 그의 추종자들로 한정함으로써 이전 왕조들의 전통을 잇고 있는 리 왕조를 쩐씨가 다시 잇는다는 차원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쩐 왕조는 리 왕조의 국호를 계승하고, 수도를 탕 롱(Thang Long:昇龍)으로 유지하는 한편 지금까지 정치와 사회적으로 사상은 물론 신앙적 지주가 되어 왔던 불교를 존중했다. 물론 이같은 정책에는 탕 롱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200년 이상을 유지해 왔던 중국 문화를 어부 출신의 토착
세력이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 아니었던가 하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쩐 왕조의 정치형태 중에 두드러진 것이라고 한다면 권력과 경제력, 그리고 군사력을 소유하고 있던 왕후와 공신귀족간의 관계에 있다. 이같은 형태는 이전의 각 왕조에서도 존재했으나, 특히 쩐 왕조의 경우 이것이 몽골항쟁 기간까지는 외형상 수평적으로 세력균형을 이루면서 왕조의 강화와 안정은 물론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군신간에 수평적인 세력균형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전국의 토지가 왕의 소유권 아래 있다는 형식과 왕권이 토지의 실제 소유권에 미쳤다고 하는 제도적 역량에 의하여 왕이 토지를 무기로 이들 왕후와 공신귀족들을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쩐 왕조가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통치역량이 전국에 미치는 중앙집권제였음을 의미할 때, 이같은 힘의 분출을 가능케 했던 태상 왕제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대몽항쟁에서 군사전략을 계획하고 운영했던 쩐 왕조의 국방정책은 국방과 경제를 동시에 추구하는 형태로 편성되었다. 즉‘병농일치(兵農一致)’의 군제로 쩐 왕조 이전의 각 왕조는 물론 이후 모든 왕조에 이르기까지 현재도 베트남이 적용하고 있는‘싸우면서 일하는 형태’를 말한다. 이를 통하여 국가는 인민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으며,왕후와 민병들은 자신들의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 전쟁에 임했던 것이다.
한편 쩐 왕조의 경제정책이 차지하는 비중 또한 적잖은데, 그것은 바로 농업의 발전이다. 과거에서 지금까지 베트남은 농업국가로 농업의 발전정도가 국가의 흥망성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농업발전이 왕권이 토지에 미치는 영향력, 국가가 실제로 확보하고 있는 토지의 양, 국가차원의 토목공사의 정도에 있었다고 했을 때, 쩐 왕조는 개국 초에서 몽골항쟁 종료까지 이같은 요소들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국가의 재정수
입을 높이고 남방의 안정을 공고히 하며 토지의 부족으로 인한 인민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던 쩐 왕조의 둔전제도 역시, 농업발전은 물론 몽골항쟁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 왕권의 강화와 토지소유의 비례가 상승된 가운데 제방사업, 간척사업, 개간사업, 둔전제도 등을 통한 공전의 확대는 계속적인 농업발전에 기여했고, 공전을 경작하는 사민(社民)으로부터 규정된 세율에 따른 조세수입이 가능해짐으로써 국
가의 재정은 높아지고 나아가 사민의 삶도 윤택해졌다.
농업발전 외에도 쩐 왕조에는 상공업의 발전이 있었다. 상공업의 발전은 먼저 정치와 사회 안정을 전제로 하며, 이는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각종 병기와 병선과 같은 전쟁물자 확보를 가능케 했다. 1251년 화폐, 토지, 도량과 같은 각종 단위가 통일되었다는 점과 인두세, 지세, 염세, 상전세 등의 각종 세금이 화폐로 거두어졌다는 점은 상공업의 발전은 물론이거니와 당시의 정치와 사회의 안정을 의미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쩐 왕조의 정책은 몽골항쟁의 승리 요인 중 중요한 내적 요인이 아닐 수 없다.
승리가 베트남에 부여하는 의미는 민족과 국명을 달리하는 향후 외세의 침략을 저지함으로써 독립과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민족적 자부심의 함양이었다. 따라서 이같은 자부심은 투쟁사로 점철되는 베트남의 역사 속에서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거나 지키는 데 지대한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