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 Bui Van Ba(부이 반 바)/하노이사범대


발표요지


베트남은 중국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비교’라고 하는 것은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영향연구(effectual study)”에 중점을 둔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경험했다.


1. 영향 관계를 비교 연구하는 일은 우선은 그 영향을 끼친 대상이 중국 역사에서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보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유교를 들 수 있겠다.
베트남에서는 현재까지도 유교를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실제로 유교는 단순하지 않으며 아주 복잡하다. 여러 파가 있으며 각 파들은 또 여러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한 요소들은 사회적 조건과 시대의 사유에 따라 항상 발전해 왔고, 그것은 항상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발전해서 유교체계를 이룩하였다. 공자가 주장한 인간의 “慾”에 대해서 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는데, 한나라의 동중서는 “損慾”을 주장했고, 송나라의 주돈이와 정이는 “無慾”, “滅慾”, “去慾”을 주장했다. 만일 “대상에 대해 상응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한다면 위에 언급한 유교사의 변천은 우리 조상들이 이 사상체계에서 어떤 것들을 받아들였는지를 보는 일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방법론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일반적인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해서 논의하기 보다는 어느 시기에 누구의 어느 측면에서 또한 그것의 사유 및 실천적 근원과 함께 그것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 “좌표”를 분명히 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호치민은 “유교’라고 부르지 않고 “공자의 학설” 또는 “公道”라고만 불렀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동중서(漢儒敎), 한유(唐儒敎) 또는 주돈이,정이(宋儒敎)의 글을 인용하지도 않았고 주로 공자와 맹자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공자와 맹자는 독일 사상계에서의 막스와 엥겔스처럼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두 사람은 당시 사회에서의 “이상을 설계”하는데 전념했던 이들 이다.
유교는 궁전에 들어간 적이 없으며, “관제화”되지 않았다. 즉, 섞이거나 조정되거나 휘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교사상과 봉건제도는 개화사상가들과 자본주의의 관계에서 유사함을 보인다. 만일 볼테르나 몽테스키외 등의 사상과 오늘날의 자본주의자와 동일하지 않다면 역시 공자와 맹자의 사상과 도덕도 옛날 봉건지주계급의 사상과 동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공자와 맹자를 아주 앙모했음에도 불구 고 호치민은 봉건통치계급의 사상을 받아들이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말하는 유교 전부를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유교 창시자들의 정수만 받아들였던 것이다.

 


2. 위의 내용과 연관을 지면서 영향을 끼친 요소들과 함께 구조를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유교에서 문학에 관한 관념도 비록 모두 “道”를 강조하고는 있지만 “文以載道”는 단지 文과 道와의 관계일 뿐이다. 그 외에도 “文以明道”, “文以貫道”, “文以弘道” 등의 관계가 있다. 이러한 것을 같은 내용을 달리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文과 道사이의 관계에 대해 보는 시각을 달리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文以載道의 작자인 주희는 “文이란 道에서 나온 것인데 어찌 文이 道를 貫할 수 있는가? 만일 文이 道를 貫하게 한다면 뿌리를 가져다 근원을 삼고 근원을 가져다 뿌리를 삼는 격이다.”라고 소동파의 文以貫道의 공식을 비판했다. 현대 중국의 『대백과전서』에 보면 “文以載道”는 ‘주돈이가 언급하였고 정이의
作文害道說로 발전되었다... 그들은 重道經文에서 重道廢文에 이르게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러 요소의 구조를 확정했을 때 각 요소의 가치와 위세가 두드러진다. 위에서 처럼 文以載道는 한 요소일 뿐만 아니라 중국 고대문학 이론 체계에서 소극적 요소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한 요소라는 것은 없으며 상응하는 체계 전부를 아우른다. 베트남에서 文以載道를 연구하기를 바란다면 이 선결의 진리를 알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현존하는 서적을 보면, 딩왕조에서 리왕조까지 文以載道의 공식이 출현한 것을 볼 수 없다. 응웬 왕조에 이르러서야 文以載道의 공식이 처음 출현하고, 그 빈도수가 높다.
이러한 것은 응웬 뜨 쟌, 부 팜 카이, 까오 수언 죽, 응웬 반 시에우와 뜨득황제를 통해서 볼 수 있다.
그래서 文以載道는 전체를 아우르지는 않으며 단지 한 요소일 뿐이며 베트남 중대 문학 체계에서 한 시기에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결론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고 오히려 그것이 발생된 나라의 현상과 마찬가지로 아주 상식적인 것이다.


3. 중국문화의 베트남에 대한 영향은 그 구조 요소들 전부에서 일정하지 않았다.


중국 고대문학 이론체계에는 유교와 불교, 도교 등의 관념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묵가나 법가의 관념을 갖고 있다. 마치 서양사상이 시대를 지나면서 풍부하고 복잡하게 발전되었지만 그 기본적 요소들은 고대 희랍과 로마사상인 것처럼 일반적으로는 중국의 철학사상 좁게는 문예사상이 정도는 서로 다르지만 중국 전국시대의 것이 계속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유교적 관념 외에도 다른 문학적 관념이 존재하지만 베트남에서 그것들의 영향은 일천하다. 예를 들어, 중국문화사에서 법가 사상의 영향으로 일어난 진시황의 분서갱유나 문화혁명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베트남에서는 현대까지도 두드러진 법가 사상의 영향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베트남에서 “쯔놈서적”을 불태우고, 인쇄를 허용하지 않은 적은 있으나 이는 유교의 정통성을 벗어난 것에 국한했을 뿐이며 유교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교를 따랐던 것으로 그 목적을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응웬 왕조의 뜨득제가 이복 형의 대역음모 이후에 연회를 베풀 때, 한 신하가 시를 지어 진상했는데, 그 내용이 왕이 이복 형을 죽이는 것이 마땅하는 내용이었다. 이것을 보고 왕은 그 신하에게 곤장 30대를 치도록 벌을 준 다음에 다시 비단과 재물로 상을 내린 일이 있었다.
물론 전제 왕의 행동이었다. 베트남에서도 害道는 있었지만 載道가 같이 있었다. 따라서 베트남 전통 속에서는 “문화혁명’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4. 중국문학, 문화의 베트남에 대한 영향은 베트남 역사발전에서 전체에 미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시가의 특징에 관한 이론에서 중국은 시대를 거쳐 오면서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중대 베트남에서 시에 관한 이론의 논쟁은 있었으나 중국에서처럼 극단적이지 않았다.


5. 중국문학, 문화의 베트남에 대한 영향은 구체적인 사회환경에 따라 달랐다. 중국 문학 속의 궁녀와 征婦에 관한 얘기는 베트남에 많이 유입되었다. 그러나 商婦의 모습은 전기만록에 언급된 것을 제외하면 거의 영향이 없다. 이백의 시에 나타난 征婦의 모습은 아마도 商婦의 모습에 비해서 월등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베트남의 당 쩐 꼰의 征婦의 모습은 어찌 그리 흥미를 끄는 것인가? 이는 만일 봉건제 하에서의 전쟁과 농민봉기 특히 찡씨 응웬씨간의 전쟁을 싫어하는 심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베트남 상업은 중국에 비해서 보잘 것 없는 상태였었다. 그리고 베트남 상인들의 활동무대가 어떻게 황하나 양자강 유역 같이 넓은 곳이 었겠는가? 이백의 시에는 商婦의 비극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베트남 문학에서 상인이나 상업을 소재로 한 작품은 거의 없다. 상인에 대해서 언급된 작품 수는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또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백거이의 장한가나 비파행, 특히 장한가가 널리 퍼졌지만 베트남에서 그 작품의 영향은 별로 없다. 반대로 비파행은 기생에 관한 얘기지만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베트남에서 더 공감을 얻었다. 응웬 주나 응웬 꽁 쯔 등이 기생을 소재로 작품을 썼다.


6. 중국문학, 문화의 베트남에 대한 영향은 베트남 수용자 층에 따라 달랐다. 같은 작품이라도 수용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졌다. 예를 들어 비파행의 작품이 응웬 주에게 있어서는 백거이의 휴머니즘을 본받고 있으나 어떤 작가는 남녀간의 성의 문제로 보는 경우도 있었다.


요약하면 중국문화의 베트남에 대한 영향이 막대하다고 할지라도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는 역사적 사유와 체계적 사유가 필요하고, 특히 세밀한 노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 배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