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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파 감자 등 눈에 익은 재료들이 많다.  

베트남 한인들의 마음의 고향 "팜반하이"
팜반하이 시장 주변 거리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호치민시에서 가장 먼저 한인촌이 형성된 곳이며 요즘 온 사람들은 잘 모르는 사람이 많치만, 좀 오래된 교민들에게는 애환도 참 많고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 요즘 많이 알려진 꽁화, 탕롱 등은 이 후 형성 된 곳이며 최대 한인 거주지인 신도시 푸미흥은 몇 년전부터  본격 형성된 신흥 한국인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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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출처: 교민신문


팜반하이 거리(Duong  Pham Van Hai) 는 시장을 중심으로 예전부터 한인들이 유난히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이다. 한국인 식당도 이 근처에 수십 개가 밀집되어 있다.
이 거리는 본래 베트남의 전쟁 영웅인 팜반하이의 이름을 따서 만든 길이다



팜반하이(Pham VAN HAI)시장


팜반하이 거리와 팜반하이 시장의 옛 이름은 각각 토아이 응옥하우(Thoai Nau- 1975년 이전에는 Cach Mang Thang Tam 에서 공항 가지 이어졌던 길)와 옹따) Ong Ta-Ta는 이 지역에 살았던 명의)였다.

하지만 75년 이후 이 지역이 발전하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사이공 출신 애국지사 판반하이의 이름을 빌려 시장과 거리 이름을  바꾸어 부를 것을 건의 했고 마침내 그 요구 조건이 받아져서 "판반하이 시장"과 "판반하이 거리"가 탄생한 것이다.

공항이 가까워서 그런지 이곳에는 한국인들이 유난히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한국인 상점도 밀집되어 있다.

주변 베트남인들도 언제부터인가 이곳을 "한국인들의 거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팜반하이에 한인들이 더욱 늘어나자 팜반하이 시장도 덩달아 김치, 마늘, 고추 등을 비롯한 한국인들이 원하는 음식 재료들을 많이 갖다 놓았다.

사이공 어디에 살든 한국인들은 필요한 물건이나 정보가 있으면 우선적으로 이곳을 들른다.

요사이 사람들이 푸미흥으로 점차 옮겨 가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팜반하이 거리는 여전히 한인들의 마음의 고향이자 한인촌 일번지임에 분명하다

팜반하이 시장은 사이공 전역에 개고기를 공급하는 장소로도 유명한데 그 이유는 하노이 사람들이 팜반하이에 많이 모여 살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그들의 전통음식인 개고기를 전파했기 때문이다.



"팜반하이"

베트남 공산당 당원이자 65연대 소속 특공대 대장 신분에서 일약 베트남 민족의 영웅으로 추대된 팜반하이  그가 걸어온 역사의 현장을 되돌아가보자.


어린 시절과 초기 상황

사이공 빈떵(Binh Tan)군의 빈농출신, 팜반하이(어릴때 이름은 Ca Nhi, 1931년생)는 아버지와 삼촌들이 프랑스군에 잡혀가자 12살의 어린 나이에 하업을 접어두고 생존 현장에 뛰어 든다.

혼자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뼈저리게 실감한지 2년 정도 지났을 때 당 간부 한 사람을 우연히 알게 된다. 그는 어린 팜반하이에게 혁명 사상과 가르침을 전수해주었는데 바로 이 무렵부터 애국전사로서의 팜반하이의 잠재력이 꽃피기 시작한다.

16세가 되었을 때 팜반하이는 군에 자원입대하여 미국과의 항쟁에 선봉에 선다.
그는 종종 적진 심장부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며 거의 모든 공작에서 탁월한 전공을 세웠다. 당의 간부 경호, 무기 수송, 아군 인도 .정찰 ,비밀 서류 전달 등등의 각종 임무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수행해 나갔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침착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했고 언제나 자기 자신보다 동지들의 안전을 더 신경 썼다.



프랑스와의 항전기(1947-1954)- 39번의 전투에서 대승

이 시기도 강과 산을 가로질러 삼언한 경비를 뚫고 적의 기지를 정찰하는 것은 언제나 팜반하이의 몫이었다
1950년 6월 1일 팜반하이는 푸토호아(pho Tho  Hoa)전투에서 적의 폭약 창고를 파괴하는 개가를 올린다
그 당시 군수물자들(9.345개의 폭탄, 2백만 리터의 기름 )이 이틀 밤낮으로 불타 올랐고 4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 날의 승리는 동지 부이방자(Vui Van Ba) 와 사전에 철저히 준비를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승전보는 삽시간에 사이공 각처로 퍼저 나갔다.

1954년 7월 고댕(Go Den)전투에서 는 팽팽한 접전으로 상황이 쉽게 마무리될것 같지 않자 그는 직접 폭탄을 들고 적의 진지로 쳐들어가 적군 30명을 사살하고 11정의 총을 뺏았았다.



미국과의 항전기(1954-1964)

10번 국도 쭝안(Trung An), 떠탄따이(Tan Thanh Tay), 떵성녁(Tan Son Nhot) , 푸토호아(Phu Tho Hoa),  낀도(Kinh Do)rmrwkd(1963. 9.21), qktekd(Bach Dang)에서의 대승  고밥(Go Vap)에서 73대의 차량파괴와 무기 창고 습격, 16.500톤의 무기를 실은 적의 함대 격퇴(1964.5.2)등등 이 당시도 팜반하이의 활약상은 대단했다.



전인민의 영웅으로

팜반하이야말로 전 군과 인민의 표상이었다.
겸손, 우정, 부하에 대한 사랑, 희생정신, 용기, 뛰어난 작전 수행능력, 물러서지 않는 강인함 등등에서 누구에게도 뒤지는 일이 없었다. 1967년 구찌 전투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인 1965년 5월2일 , 팜반하이는 마침내 남부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중앙인위원회로부터 2급 해방 군공 훈장과 함께 무장인민해방군의 영웅 (Anh Hung Luc Luong Vu Trang Nham Dan Giai Phong)으로 추대된다.
또 다시 1급 해방 전공 훈장(1Huan Truong Chien Cong Giai Phong hang nhat)을 받기도 했다

글(펌)/ 작성자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