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유네스코 아시아ㆍ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 편. 『

국제이해교육』 (통권 14호, 2005)에 실린 송정남(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교수)의 “장가를 가려면 째오를 내야 한다”에서 발췌하여 편집한 것임.

 

베트남 사람들은 결혼을 두 사람만의 사사(私事)가 아니라 가족, 친족 그리고 마을과 관련이 있는 공사(公事)로 생각했다. 결혼이 가족과 친족에게는 혈통유지, 명예와 같은 의미를 부여하는 한편, 마을에는 토지분배와 같은 경제적인 변화에 영향을 끼쳐 왔기 때문이다.

또한 결혼이 신성하며 합법적이어야 한다는 전통적 결혼관에서 혼사는 가정과 친족, 나아가 마을을 결속시키는 요소였 다. 이같은 신성과 합법성은 혼례절차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신랑이 마을에 돈 등을 납부하는 째오(cheo)라고 부르는 요식행위는 결혼의 합법성을 공인하는 역할을 했다. 째오는 주로 벽돌, 쟁 반, 도자기, 돈 등으로, 이는 경제적인 것보다는 상징의 의미가 컸다.

혼인하는 남녀가 같은 부락 사람이냐 아니냐에 따라 내(內)째오와 외(外)째오로 나뉘었고, 외째오는 부담이 더 컸다. 째오를 받아들인 마을에서는 신랑에게 일종의 혼인신고서라 할 수 있는 떠 째오(tò cheo)를 주었다. 물론 이 방법들이 합리적이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폐단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의 공사개념이 가진 감시기능 덕분에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잘 유지하고 나아가 부부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충돌을 완 화시켜주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가통 잇기가 가장 중요

베트남 사람들이 생각하는 결혼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가통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 그렇기 때 문에 결혼을 특히 남자가 어른이 된다는 의미 즉 가통을 이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춘다는 뜻으로 여겼다. 전통적인 베트남 결혼에서는 배우자 선택부터 가정을 이루는 시점까지 부모와 중매의 역 할이 컸다. 이같은 결혼관 때문에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 칠거지악이라 하여 쫓겨나거나, 남 자는 가통을 잇는다는 이유로 첩을 둘 수 있었다.

가통 유지와 함께 결혼을 하는 목적에는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이 때문에 어린 자식을 일찍 결혼시키기도 하고, 심지어 부유한 집에서는 많은 첩을 두기도 했다.

과거 베트남에서는 부모가 자녀의 결혼을 통제했고, 지금도 대부분 부모의 영향력으로 결혼이 성사되고 있다.

한편 „여십삼 (女十三), 남십육(男十六)‟이라는 말처럼 전통시대부터 베트남은 조혼이 일반적이었다. 요즘도 소 수민족이 사는 곳과 농촌지역에는 정부 규제에도 불구하고 조혼이 꽤 흔하다.

이 밖에도 다양한 관계를 맺기 위해 결혼이 필요했다. 양가 부친 간의 절친함을 유지하기 위 해 아이들이 어렸을 때나 심지어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을 하기도 했다.

왕가에서는 효율적인 지 배를 위해 결혼을 이용했다. 베트남은 내용으로는 자치국가 형태로 존재하던 소수민족이 많은 국 가였기에 왕이 이들을 지배하기 위해 많은 추장들을 부마로 삼는 예가 있었다.

정치인이나 경제 인이라면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위해 결혼을 했다.

 

딸을 멀리 시집보내면 조상과 자식을 잃는다

베트남 사람들의 결혼풍속은 북속시대(중국의 식민지 시대, 기원전179년~서기938년)에 중국에 서 들여왔다. 중국의 결혼절차는 한국과 같이 납채(納采), 문명(問名), 납길(納吉), 납징(納徵)(혹은 납폐納幣), 청기(請期), 친영(親迎) 이렇게 육례였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은 이를 정혼(訂婚), 문명, 납징, 영혼(迎婚), 이희(二喜)의 형태로 이름을 바꾸거나 간소화시켰다. 육례는 간소화되어 보 통은 문명, 납폐, 친영 등 삼례만 사용했다.

 

정혼례는 남자집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집에 중매를 보내 결혼할 생각이 있는지 미리 떠보는 것이다. 문명례는 처녀의 이름과 사주를 묻는 절차고, 납징은 남자집에서 여자집으로 까우(빈랑열 매), 술, 차 등을 보내는 일이다. 결혼식을 치르는 것 즉 신랑이 신부를 집으로 데려오는 절차가 영혼례이며, 결혼한 뒤 신랑과 신부가 신부집에 가는 것이 이희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우선 문당호대(門堂戶對)라고 하여 남자측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인 면에서 비슷한 여자측 가문을 찾아 여자 나이를 살펴보고 적합하면 중매인을 신부측에 보내 결혼 할 생각이 있는지 미리 떠본다.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은 베트남 사람들의 통혼권은 마을 사람으 로 제한하는 경향이 강하다. “들판의 수우(水牛)는 그 들판의 풀을 먹어야 한다”, “딸을 멀리 시집 보내면 조상과 자식을 잃는다”는 속담 등은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여자측이 동의하면 남자와 여자의 궁합을 보기 위해 다시 중매인을 남자측 대표자와 함께 여 자측에 보내 여자의 이름과 생년, 생월, 생일, 생시를 적어오게 한다.

속궁합은 남자와 여자의 나 이를 보는 것으로, 십이지(十二支)를 상징하는 동물을 갖고 서로 어울리는지를 비교한다. 남자와 여자의 생년월일을 오행(金 ·木· 水· 火· 土)에 따라 비교하여 서로 어울리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겉궁합이다.

궁합은 생사화복을 포함한 모든 인간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그 렇기 때문에 다른 조건이 좋다고 할지라도 서로 궁합이 맞지 않으면 혼사는 대부분 성사되지 않 았다.

만약 두 사람의 궁합이 잘 맞으면 중매인은 남자측 부모와 함께 쩌우(구장잎), 까우, 차, 술, 떡 등의 예물을 가지고 신부집에 가서 약혼식을 치른다.

안호이(an hoi) 례가 끝나면 여자측은 예물의 일부를 신랑측에 돌려 주고 나머지는 친척들에게 나눠 준다. 이는 곧 결혼식이 있음을 알리는 의 미가 된다. 결혼식이 있는 날 신랑은 가장 좋은 시간을 정해 신부를 맞으러 신부집에 간다.

신랑측 행렬 의 맨앞은 까우와 신부의 패물함을 든 주혼이 가고, 그 뒤에 결혼식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따른다. 성대한 결혼식에서는 거위 한 쌍을 들고 가는 어린아이 둘과 홍사초롱을 들고 가는 어린아이 둘 을 맨 앞에 내세웠다.

신랑의 행렬이 신부 마을을 지나갈 때 마을 사람들은 실타래로 길을 막아 놓거나 신부집 대문을 닫아 놓고 신랑측에 돈을 요구하는데, 이때 신랑측이 돈을 주면 들어갈 수 있다.

신부집에 도착하면 먼저 조상의 신위를 모신 제단에 가서 가선례를 지낸다. 이어서 신랑신부 는 마당 가운데 차려진 향안(香案: 술, 닭, 쩌우, 까우, 쏘이 등이 차려진 단) 앞에서 홍사례(紅絲 禮)를 치른다. 홍사례가 끝나면 신랑은 장인, 장모에게 예를 드린 다음 축하객들과 함께 잔치를 벌인다.

잔치가 끝나면 신랑은 그날 밤에 신부를 데리고 집으로 온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가 화로를 들고 앞서가면 신랑이 그 뒤를 따르고, 신부는 친척들과 함께 또 그 뒤를 따라간다. 이때 신부 부모는 가지 않는다.

신랑집에 도착하면 할머니가 신부를 제단에 인도하여 신랑의 조상에게 가선례를 올리게 하고, 이어 신부는 신랑측 조상들을 모시고 있는 신묘(神廟)에 가서 예를 올린 다음 조부모와 부모 그 리고 시가 친척들에게 인사를 올린다.

이때 그들은 신부에게 금, 은, 천과 같은 축하예물을 준다. 첫날밤 신랑과 신부는 홍사례에 사용된 쩌우와 까우를 서로 절반씩 씹고, 또 술 한 잔을 절반 씩 나누어 마시는 합근례를 올린다.

그런 다음 신부가 신랑에게 절을 두 번 하면 답례로 신랑이 신부에게 절을 한 번 한다.

사흘 뒤에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신부집으로 간다. 이때도 역시 먼저 조상에게 가선례를 올리 고 신부측 친지들에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 신부를 데리고 신랑집으로 돌아옴으로써 혼례는 끝이 난다. 이제 신부는 신랑측 가족의 한 사람이다.

 

혼인한 여자에게 요구하는 네 가지 덕목

요즘은 결혼관에도 여러 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당사자의 생각이 배제된 결혼 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결혼관도 변하여 배우자와 자신의 인생을 위한 결혼이 우선이다. 따라서 배우자 가문과 출신 성분을 중시하던 과거의 선택 기준보다는 경제력, 학력, 직업, 성격, 외모 등에 더 많은 비중을 둔다.

여자는 우선 남자의 능력을 본다. 더불어 결혼 연령도 높아지고 아들 낳기 혹은 다산의 개념도 사라지고 있다. 결혼관의 변화는 베트남 사회에 고질병으로 자리 잡은 고부관계에도 큰 변화를 주었다.

유교 의 영향을 깊이 받은 베트남의 가족구조는 위계질서가 확실한 부계 대가족이다. 그래서 결혼한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며느리는 가족 내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시어머니 밑에서 혹독한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이 때문에 친정 으로 돌아가거나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저기 여인네 논(베트남 여인들이 쓰는 원뿔 형 모자) 쓰고 어디 가는고? 나는 며느리 신분으로 왔다가 시어미 얼마나 잔인한지, 더 살 수 없 어 친정으로 돌아간다오”라는 민요는 힘든 시집살이에 대한 며느리들의 애환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농촌의 가족관계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제도와 사회가 변하면서 고부간의 갈등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경제적인 요인 때문에 결혼 직후 분가가 쉽지 않기도 하거니와 세대간의 의식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도시에 비해 농촌에서는 아직도 결혼을 하 면 시집살이를 하는 것이 보편적이고, 시부모를 모시는 것이 규범으로 되어 있어 실제로 아들에 게 의지하려는 시어머니의 감정과 남편에게 전적으로 매여 사는 며느리 사이에는 미묘한 경합과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사덕(四德: 공·용·언·행)은 결혼한 여자에게 요구하는 덕목이다.

공(工)은 집안일과 농사일을 잘 하는 손재주를, 용(容)은 외적 아름다움을, 언(言)은 부드럽고 공손하며 상냥하게 말하는 태도를, 행(幸)은 위아래 사람에게 공손, 겸손하며 남편에게 순종하며 자식에게 자애롭고 이웃에게 친절한 몸가짐을 의미한다. 남자들 중에는 여자를 고를 때 용을 우선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사덕은 베트 남 사회에서 지금도 변치 않는 평가기준이다.

 

결혼 상대를 한 마을에서 찾는 것은 여전해

요즘 결혼식은 과거와는 달리 절차가 복잡하지 않지만 그 형식이 다양하다.

농촌에서는 전통 식으로, 도시에서는 서양식으로 결혼식을 치르는 경우가 많다.

도시에서는 약혼식 때 씩로(xic lo: 자전거와 비슷하다)를 타고 가거나, 결혼식 날 차를 가지고 신부를 맞으러 가거나, 호텔이나 공공 기관에서 결혼식을 하거나, 신랑ㆍ신부의 결혼예복이 양복과 웨딩드레스거나, 일부 신혼부부가 신 혼여행을 가는 예가 많다.

따라서 결혼철인 봄과 가을에는 신부를 맞는 차량 행렬을 자주 볼 수 있고 신부 차량을 뒤따르는 많은 차와 오토바이 때문에 거리가 자주 막히는 불편이 따르기도 한다.

이같은 결혼식 행사들을 모두 비디오로 찍는다. 전통 예식에서는 신랑과 신부 모두 아오자이를 입고 머리에는 찟칸(chit khan: 띠를 둥글게 말 아 만든 모자)을 썼다. 아오자이 색깔은 신부라면 보통 붉은색, 신랑이라면 파란색이나 녹색이었다.

그러나 서양식을 따르는 요즘은 신랑이 짙고 검푸른 색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 를 맨다.

결혼을 치르는 계절은 보통 가을에서 구정 전까지다. 베트남 사람들은 여름 결혼을 금기로 여 긴다.

겨울이나 여름을 피하는 한국과도 비슷하다.

베트남의 결혼식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하객의 선물이다. 이는 결혼을 축하한다는 것이 우선 이겠지만 한국처럼 혼상제를 중시하는 문화에서 이를 준비하는 측의 경제적인 부담을 얼마간 덜 어준다는 상부상조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하객들은 양가 부모의 친척과 친지 그리고 신랑ㆍ신 부의 친지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축의금을 내지만 실용적인 것 혹은 오래 동안 간직할 것을 생각 하여 생필품이나 기념품으로 선물하기도 한다. 극히 일부이기는 하나 지금도 하떠이(Ha Tay)나 푸토(Phu Tho) 등에서는 예식 이후 신부가 친 정에 갔다가 정해진 기간이 지난 다음에 시댁으로 돌아오는 씬베(xin ve) 풍속이 있다.

대개 여자 가 잉태하면 친정으로 돌아갔다가 해산 이후 까우가 꽃을 피우고 모내기철이 되면 시댁으로 돌아 오는 풍속이 있었으나, 씬베는 이와는 달리 길게는 3년까지도 친정에 있다가 남편의 요청으로 친정의 허락을 받아 시댁에 돌아오는 형태이다. 이와 더불어 약혼한 뒤 남자가 일정 기간 여자 집에서 함께 생활하다가 이를 바탕으로 사위로 결정되는 풍속도 있었다.

물론 이 기간에 약혼한 남녀는 혼숙을 할 수 없었으며 만약 사윗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자측은 남자측에 그동안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개방 이후에 변화가 조금 있기는 하나 결혼 상대는 예나 지금이나 거의 마을 내에서 찾는다. 이는 살아 있을 때나 돌아갔을 때 구별 없이 부모를 가까이서 잘 섬겨야 한다는 효행주의와 극히 폐쇄적이며 강한 공동체를 띠고 있는 마을의 특징 그리고 전통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좁은 통혼권 에 있다.

프랑스 식민시대와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기간 그리고 개방 이후에 베트남 여자들이 외국 남 자와 결혼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으나, 베트남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외국 남자와의 결혼을 심히 경멸했다.

이를 잘 표현하는 속어로 „탕응오꼰디‟(Thang Ngo Con Ð i)가 있다. 중국 사람과 베트남 여자를 얘기하는데, 각각 „중국 놈‟과 „음탕한 년‟을 뜻한다. 그 뒤 프랑스와 미국이 베트남에 진 출하면서 서양 남자와 결혼한 베트남 여인을 뜻하는 „메떠이(Me Tay: 떠이는 한자의 „西‟로 서양 을 뜻한다)‟라는 용어가 나왔다.

그리하여 프랑스 사람과 결혼한 여인을 „메팝(Me Phap: 팝은 한자 의 „法‟으로 프랑스를 뜻한다)‟, 미국인과 결혼한 여인을 „메미(Me My: 미는 한자의 „美‟로 미국을 뜻한다)‟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