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이해하기
인도차이나 반도 동부에 위치한 베트남은 한국과 비슷한 역사를 거쳐왔다. 중국과의 접경으로 역사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아왔고받아왔고 근현대사에 있어서 외세의 침략과 독립운동 이후 남북전쟁 등 굉장히 유사한 점이점이 많다. 종교에 있어서도 불교신자가 80% 이상을 차지하며 비슷한 문화색채를 나타내고 있다.있다.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는 달리 베트남의 불교는 소승불교가 아닌 대승불교이다. 이는 오랜오랜 중국의 지배 하에서 받은 영향으로 이러한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비슷한 양식이 나타난다.
베 트남 불교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베트남의 지정학적 위치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베트남은 지정학적으로 육지와 바다를 잇는 반도국이면서 문명이 발달할 수 있는 환경에 의해 일찍부터 많은 민족이 교차할 수 있는 지역이 되었다. 이것은 베트남의 다민족, 다 종족적인 특징을 잘 표현하는 것이 되면서 고․중․대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와 서구열강들의 군사, 경제, 정치, 문화의 각축장이 되는 이유였다. 이와 같이 지리적인 특징에 의하여 베트남의 문화는 크게 북부의 중국문화와 남부의 인도문화로 나눠지며, 불교도 북부의 대승불교와 남부의 상좌불교로 구분된다. 베트남은 중국과 1,400km 에 걸친 접경국가로 기원전 179년을 기점으로 기원후 938년까지 1,000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고 1406년에서 1428까지 명의 지배를 받았다. 베트남 북부는 중국과의 접경지역인 점과 장기간의 지배 및 종주관계에서 비롯된 이유 외에도 보다 발달된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려는 베트남의 능동적 자세에 의해 중국의 문화와 영향을 깊이 받았다. 반면 베트남 남부는 북부처럼 정비되고 안정된 장기적인 국가형태를 이루지 못했던 까닭에 비록 인도와 서역의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북부에 병합되면서 단순히 소수민족의 문화로 전락되었다.
불교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는 알 수 가 없으나 일찍이 해로(海路)를 통해 인도와 남해로부터 들어왔던 것만은 확실하다. 중국인으로 194~195년경에 쟈오주에서 불교에 귀의하고 중국 불교사상에 영향을 미쳤던 모자(眸子)가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리혹론(理惑論)에서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을 체계화 시켜 베트남의 三敎동원 사상에 대한 개념을 세우는데도 공헌하였다. 좀더 앞서 후한(後漢)말 쟈오찌군(郡)의 태수였던 사섭(士燮)이 있다. 사섭은 유학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면서 불교에도 심취한 인물이었다. 그것은 태수로 베트남에 재직하던 중 그가 출입을 할 때에 많은 인도 승려들이 향을 피우며 수행했다고 하는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다. 베트남 불교 발전의 중심지였던 루이러우 또한 베트남 불교 유입시기를 추론할 수 있는 중요한 사적지가 된다.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중국에 유입된 불교가 남 중국에 전파되기 이전에 하박성 투언타잉 현의 루이러우에는 20층의 보탑(寶塔)이 있는 사원이 있었고, 이곳에서 500명 이상의 승려에 의해서 20권 이상의 불경이 한역(漢譯)되었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미루어 봤을 때 남 중국의 불교는 전래속도가 베트남 보다 늦었다고 하는 것과 베트남의 불교는 중국을 거쳐 전파된 게 아닌 인도의 승려들에 의해 직접 전해졌다고 추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일부 베트남이나 중국의 일부 학자들 중에는 베트남이 중국보다 먼저 불교가 유입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2세기부터 5세기의 베트남 불교는 주로 인도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5세기부터 베트남은 중국의 불교 영향을 많이 받게 되면서 귀족(貴族)성을 띤 대승불교(大乘佛敎)가 발전하게 되었다. 이에 반하여 상좌불교(上座佛敎)는 10~12세기에 남방에서 스리랑카와 캄보디아를 거쳐 남부 베트남에 전해졌다. 이 상좌불교는 베트남의 소수민족인 커메(Kho' me)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에 일명 ‘커메불교’라고도 한다.
6세기부터 10세기 독립 시기까지의 베트남 불교는 중국의 지배로 인하여 중국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 때는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베트남이 중국의 영향을 깊이 받았던 시기로, 베트남은 당나라에 중국의 많은 고승들이 구도를 목적으로 인도를 순례할 경우 반드시 거쳐야 했던 경유지였던 까닭에 이들로 인한 중국 불교의 전파가 활성화되었다.
당시에 상류지식계층으로 인식되었던 승려는 한자를 가르치는 교육사업과 병을 치료하는 의료활동도 하였다. 그리고 주목되는 점은 베트남 불교는 도교 및 민간신앙과 어우러져 발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난 이후 15세기까지의 기간은 베트남의 불교가 가장 발전했던 시기이다. 딘 왕조(968~980년)와 前레(黎)왕조(980~1009년)때에는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를 등용할 정도로 유학이 아직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승려들이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승려중 퐢투언은 宋과의 외교에서 공을 세웠고, 딩 보링은 국가정립과 사회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불교를 국교로 삼고 승려의 승직(陞職)을 두었다. 그리고 국사를 논하는 조정의 백관(百官)회의에도 참석하였다. 승관에 의해 관리되는 사원들에게는 토지가 주어졌고 베트남 불교가 일찍부터 사원전(寺院田)으로 경제문제를 자체 해결하게 했던 요인이 되었다.
베트남의 불교는 리(李) 왕조(1009~1225년)때에 가장 발전하였다. 이는 왕조를 열었던 리 꽁 우언(李公蘊)의 출생과 관련한 전설과 관련되어 있다. 리 왕조의 불교는 왕과 귀족은 물론 사회의 모든 계층에 넓고 깊게 전파되어 사람들의 문화와 생활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리 꽁 우언은 승려들을 귀하게 여겼고, 많은 사원과 사탑과 종을 만들었고, 1018년에는 응우옌 다오 타잉과 팜 학을 중국에 보내어 삼장경(三藏經)을 가져오게 하였다. 리 왕조의 숭불정책(崇佛政策)에 힘입어 불교 건축문화가 발달했다. 하지만 리 왕조 말 국정의 문란과 사회의 불안을 이용하여 귀족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사원 역시 농민을 수탈하는 집단으로 변질되었다. 사원은 농민들을 대상으로 고리 대금업을 통하여 많은 이익을 챙겼고, 채무를 갚지 못하는 농민들을 자신들의 노비로 삼았다.
쩐(陳) 왕조(1225~1400년)에서도 불교는 여전히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불교는 질보다는 양적인 면에서 발전하였다. 쩐 왕조는 몽고항쟁과 같은 국가 사회의 혼란에서 사람들이 불교에서 위로와 안식을 찾고자 한 것에서 왕과 귀족은 물론 많은 불자들의 보시(布施)로 양적축적을 도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병폐가 악화되어 가자 호 꾸이 리(胡季犛)가 개혁을 도모했다. 호 꾸이 리는 승려들도 병역을 담당하게 하였고 사원의 도병(道兵)을 동원하여 점성을 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것들을 토대로 당시 쩐 왕조의 영향아래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사원들은 엄격한 왕권의 통제아래 두어졌고 이러한 조치들로 승려의 자질을 높여 불교의 발전에 기여하는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남북조(南北朝)시대와 남북 대립기의 불교는 눈에 띌만한 발전이 없었다. 북부의 경우는 17세기에 중국에서 선종의 5가의 임제파와 조동파가 들어왔고 당시의 불교는 종교 사상적인 면보다는 민간 신앙적인 면에서 크게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남부의 경우 불교는 새로운 개척지였던 점과 비록 참족(Cham)의 대승불교가 있기는 하였으나 참족이 베트남에 병합 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유교가 국교로 인정되었던 응우옌(院) 왕조(1802~1887년)에서도 불교는 민중을 중심으로 계속 발전하였다. 응우옌 왕조에서는 왕에 따라서 불교에 대한 인식이 크게 차이를 보이는데 쟈롱(嘉隆)제와 뜨 득(嗣德)제가 불교를 멀리한 반면 밍 망(明命)제와 티에우 찌제는 불교에 깊이 심취했다. 불교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유교의 국교화와 과거시험에 의한 관료제도가 확립되었어도 이전 왕조들과 같이 억불정책이 없었던 것과 오랜 세월 동안 민중의 삶과 함께한 불교는 계속되어 큰 집단을 형성하며 발전하였다.
19세기의 하노이와 후에(Hue) 그리고 사이공(Saigon)은 불교의 중심지였다. 당시에 중국의 광동과 복건지방의 승려들이 베트남에서 활동하였는데, 하띠엔(Ha Tien)은 중국인 승려들의 활동지로 각광을 받았다. 중국인 승려들은 주로 화교들을 위해 활동하였다. 프랑스 식민시기의 베트남 불교는 크게 두 가지 특징으로 나타났다. 첫째는 기존의 각종 종교와 민간신앙을 결합한 새로운 종교의 출현이고 둘째는 19세기 말에 스리랑카, 인도, 중국, 일본 등에서 시작된 불교갱신운동의 전개이다. 유교, 불교, 도교 등과 전통적인 민간신앙과의 결합에 의해 출현한 불교는 프랑스 식민지시대라는 역사적 배경이 보여주듯이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강하게 띄는 민족종교 내지 신비주의적인 면이 많았다. 때문에 불교는 항불(抗佛)투쟁에 깊숙이 가담하였다. 19세기에 출현한 브우 선 끼 흐엉불교와 뜨 언 히에우 응이어불교가 있으며, 20세기 초에 출현한 까오 다이교(高臺)와 호아 하오(和好)교가 있다. 브우 선 끼 흐엉은 선종의 승단을 조직할 방법으로 건촌과 유교 및 도교, 그리고 불교의 심오한 사상, 특히 유교의 충효사상을 결합한 교리적 특징을 갖는데 이러한 특징은 종교적이지만 중심 내용은 항불을 위해 군중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애국활동이 강했다.
불교갱신운동은 불교가 학문으로 인식되어 연구되기 시작한 것과 불교의 현대화를 목표로 서구의 사회단체들을 모방한 각종 조직들이 생겨난 것, 전도 방법에 있어 신문, 책과 같은 출판물이 베트남어를 통해 다양하게 만들어진 것들이다. 한편 불교의 다양한 종파와 조직의 난립 양상 가운데서 베트남 불교의 통일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1951년 후에에서 전국의 51개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6개의 지회로 구성된 ‘베트남불교총회’가 조직되고 세계 불교와의 연대를 목적으로 ‘세계불교연우’에 가입했다. 이후 불교조직은 여러 요인에 의해 해산과 결합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1958년에‘ 베트남통일불교회’로 재조직 되었다.
프랑스의 침략이후 1945년 베트남 팔월혁명까지 베트남의 불교는 프랑스의 탄압에 의해 역사시대에서 가장 침체기를 맞았다. 신도들의 수가 급속히 감소하였고, 승려들은 환속하여야했다. 프랑스의 베트남 불교 탄압은 과거에 베트남 불교가 가졌던 호국성에서 주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식민지 하에서의 사원은 근왕운동, 유신운동, 동유운동 등 민족해방운동을 위한 거점으로 많이 이용되었기 때문에 식민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지만 1930년대에는 베트남인의 신성숭배와 운명론을 고취시킨다는 불교진흥운동 등의 형식으로 전개되었다.
제 2차 인도차이나 전쟁 기간은 베트남 불교역사에서 가장 변화가 많은 때였다. 공산 주의체제인 북부의 경우, 불교는 정부 조직인 종교위원회의 관리와 통제 하에 들어갔다. 불교의 모든 재산이 국유화되었고 사원과 승려의 수가 정돈되었고, 1954년의 제네바협정 이후 남부베트남에서는 1964년 1월에 ‘남부 베트남 불교보호연파위원회’ 소속 11개 단체 대표자 회의를 갖고 ‘통일베트남불교교회’를 설립하였다. 당시에 남부에서는 많은 사원들이 세워졌는데. 사이공의 경우 1954년에 300개였던 것이 1975년에 1,138개가 늘어났다. 1975년 4월에 베트남을 공산화 통일한 정부는 1981년 11월, 베트남의 9개 불교종파들을 ‘베트남불교교회’로 통합했다. 1993년 호치민시에서 열린 제 3회 '베트남불교회'의 발표에 의하면, 전 국민의 85%가 불교신자이며, 그 중 비구 및 비구니는 20,000명이었다. 그리고 1991년을 기준으로 4,374개의 사원이 있는데 그 중 150개는 메콩델타에 있는 '커메블교' 사원이다. 오늘 날 베트남의 불교는 1천만 신도에 26,268명의 승려 그리고 14,353개의 사원을 갖고 있다. 이 중 '커메불교'는 1백만의 신도에 1만의 승려 그리고 440개의 사원이 있다.
베트남의 불교는 처음에 귀족성을 띄면서 정치 군사 외교 경제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유교, 도교 등과도 잘 융화하여 베트남 종교발전에 공헌하였다. 그리고 점차 민중과 함께 하는 성격을 띄며 대불항쟁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주었다.
베트남의 종교는 상당히 자유로워 현재 베트남인들의 70~80%는 불교신자이고, 약10%내외는 천주교, 까오 다이교도, 호아하오 불교, 개신교도, 크메르와 참족을 중심으로 이슬람교, 힌두교 등이 혼재되어 있다. 이러한 종교에 있어서의 자유는 세계가 본받을만 하다고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유인선,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이산, 2002.
양승윤, 『경제개혁으로 21세기를 여는 민족주의의나라 베트남』, 한국외대. 2000.
전경수, 『베트남 일기』, 통나무.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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