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UJ님


 베트남 내 크메르인의 역사와 베트남화 과정 이해

 

목 차

1. 시작하는 말
2. 연구의 목적
3. 메콩델타의 왕국 변천사 (크메르인의 역사)
4. 과도기: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의 관계
5. 베트남의 남진 과정
6. 베트남 남진의 중국인 역활
7. 베트남인의 영토와 거주 확장방식
8. 남진 역사과정의 크메르인
9. 맺는 말

2002년 9월 28일, 사 이 공 포 럼


1.시작하는 말
 tudeol4_2.jpg 한국인이 베트남인과 친해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오히려 그 어떤 나라보다도 정감을 느낄 수 있는 공통점이 아주 많다. 부썬투이씨가 한국인을 위해 쓴 베트남 사람들과 문화에 대한 글을 읽어보면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한국인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최준식 교수가 주장하는 한국인의 유교적 특성과 가족 집단주의 그리고 무속적인성향에서 두드러진다(최준식,1997). 그러나 한국인이 베트남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한국인은 태어나면서 한민족 한 정부 한 문화권 안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다문화 다민족의 베트남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왜 베트남이 21세기라는 시점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공산당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는지, 또 종교의 제한적인 틀을 아직도 깨뜨리지 못하고 긴장관계에 있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이들의 문화와 역사의 복합성을 귀 기울여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국민성에 있어서도 처음 베트남인을 접할 때 아주 비슷한 기질을 느낄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가장 중요한 부분들에서 아주 다른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은 3개의 커다란 문화권과 54개의 민족을 묶은 다문화 다민족국가라 할 수 있다. 북부베트남은 홍하델타를 중심으로 킨족(비엣족) 문화권이고 중부는 참족에 의해 형성된 참파왕국의 영향권이었고, 남부는 앙코르로 대변되는 크메르인의 문화권으로 출발했다. 지금도 그 영향이 그대로 남아있고, 독자성이 유지된 지역 문화와 54개의 종족의 다양성이 한 국가와 한 정부조직에 의해 통치되어 지고 있지만 여전히 문화간, 민족간의 긴장과 격차를 좁히기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특별히 베트남을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은 수도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북부문화권을 기본적인 자료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지금까지 수행된 연구들은 남부를 북부문화 전통의 연속으로 보고 이루어 졌거나, 아니면 고정되고 단일한 생활공간으로서의 공동체 개념을 기본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지역간, 국가간의 교류의 상황을 배제시킨 가운데 행해졌다. 과거 이러한 문화연구는 메콩델타 사회의 문화가 시공간적인 공존과 혼성상태에 개입되어 있는 상황을 고려하지 못함으로써 남부 문화의 독자성을 파악하는데 실패를 가져왔었다(하 순, 2002: 223~224).
또한 지난 십수 년 사이 일어난 민족주의의 발흥과 세계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용이함은, 확고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세를 이완시켰고 민족 국가들의 힘을 침식하기 시작했다.(패트릭 존스톤, 1999: 312) 한 국가 안의 여러 인종, 언어, 종교집단은 꼭 국가로서의 독립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정체에 대한 인정을 얻기 위해 투쟁하려는 경향은 남아있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후반에 들어 오히려 증가했다 ( Geert Hofstede 1995:35-36 ). 이러한 결과는 전 세계237개 국가와 영토(패트릭 존스톤, 1998, 2000년판 자료)의 많은 곳에서 일어나는 공통성이다. 그만큼 이시대의 관심은 국가라는 단위를 뛰어넘는 민족이라는 개념에 더 예민성을 나타내고 있다.
베트남, 특히 사이공과 메콩델타 중심의 남부 베트남을 이해함에 있어서 이러한 맥락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특정 전문인을 제외하고 베트남인이나 크메르인이나 모두 남부 메콩지역에 대한 자신들의 상식적인 역사성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현실이다. 물론 학교나 어떤 기관을 통해서도 이러한 정확한 역사성을 공부할 기회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성을 이야기 한다는 자체가 너무 어색하고 낯 설은 이야기로 전해질 수 있다. 이것은 아직도 지역간, 민족간, 이데올로기간의 그리고 문화간의 충돌이 아직도 식지 않은 이유로 스스로의 정체성에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가 가장 큰 부분을 찾지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연구의 목적
 tudeol4_3.jpg 대한민국의 경우 수백 년, 수천 년에 걸쳐 같은 땅덩어리, 같은 민족 안에서 지금의 영토를 형성한 국가로 존재한다. 전쟁이 있었지만 대부분 같은 영토에서 형성된 나라간의 분쟁이었고, 다른 민족간의 전쟁은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베트남의 경우 홍하델타를 출발로(역사적인 근원으로는 남중국에서 출발)남진이 끝나고 1765년경에 캄보디아와 국경을 형성하게 되었고, 1802년 자롱황제가 베트남의 남북을 통일하여 오늘날의 베트남의 영토를 포괄하는 베트남 최초의 왕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때도 불완전한 영토였고, 1859년에 시작하여 프랑스의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조정되고, 정착화 되어졌고, 사실상 근대에 와서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게 결정되어 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베트남의 영토문제는 아주 짧은 근대 일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가장 뒤늦게 베트남화한 지역이 메콩강 델타지역이고 크메르인이었다.
그러기에 사이공과 크메르인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지 않고는 남부 베트남의 역사와 지금의 베트남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사이공이라는 지명의 땅도 과거 크메르인들의 변방이었던 곳이고, 남부 베트남의 핵심인 메콩델타지역도 크메르인들이 터를 잡고 살고 있던 크메르인들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300년 전 크메르인과 스팅족, 마족이 중심이 되어 어우러져 살던 사이공에 처음 발을 내딛은 베트남 유민들은 아직 개간되지 않은 조밀한 숲과 습지만 있었던 사이공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상한 국토에 와서 새 우는 소리가 무서웠고, 물고기가 노니는 것에 놀랐다 (CHINH TRI QUOC GIA:국가정부 출판부 1998). 그리고 이후 이곳에서 종족 간에, 문화 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서로 어떤 영향을 주며, 어떤 도시를 이루게 되었는지, 그리고 베트남 남부라는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어 오면서 주변 민족과 문화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흥미로운 일이다.
선교적 입장에서도 크메르 민족은 베트남 소수민족의 관문종족이라 말할 수 있으며(YWAM, TAGET 2020 종족리스트 자료), 사이공과 남부베트남을 이해함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베트남 내의 크메르인은 남부지방에서 가장 큰 소수 민족이면서도 가장 복음화가 되지 않은 유일한 민족이기도 하다.
과연 크메르인은 누구인지? 어떤 과정에서 메콩델타가 베트남 화 되었는지? 크메르인들이 어떻게 베트남에 130만이나 되는 인구가 살고 있게 되었는지? 그들의 상호관계는 어떠한지? 그리고 어떻게 베트남 내에서 크메르인들이 지금의 본국이라 할 수 있는 캄보디아에 버금가게 그들만의 종교와 문화를 지키며 살 수 있었는지? 현재의 상황은 어떠한지? 에 대하여 이해할 때 비로소 베트남과 크메르인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메콩델타의 역사성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글의 방향은 이러한 상황을 알리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3. 메콩델타의 왕국 변천사 (크메르인의 역사)


가. 푸난 왕국(扶南)시대 (1세기-6세기)
 tudeol4_4.jpg 1세기에는 중국과 인도가 바다를 통한 무역과 영역을 확장하는 시기로 중국과 인도사이의 동남아는 이러한 중계지역으로 이용 되었다. 무역이 증가하면서 인도와 중국간의 교역은 보다 낳은 선적기술, 항해기술이 발전을 거듭하게 되며, 인도의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생각들이 동남아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어 인도의 문화가 크메르에 의해 흡수되어 지는 인도화를 겪게 된다. 무역이 발전하면서 해안을 따라 항구 주변에 정착지가 형성된다.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이 당시의 초기 정착지인 옥-에오(Oc-Eo) 는 무역상들에 의해 메콩 델타의 고대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다. 2-3세기의 추정되는 옥-에오(Oc-Eo)에서 발견된 로마 동전, 인도 보석, 불교 관련용품으로 보아, 항구를 따라 형성된 거대한 해양 무역 네트워크는 로마제국과 지중해 지역까지 확장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푸난은 남중국해의 중계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 때 특히 옥 에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Vo Si Khai '사이공 300주년 기념', 1998).
델타 하류지역에 정착지가 형성되면서 이 지역에 정착인 들은 몬-크메르 계열의 언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캄보디아의 언어적인 근원을 제공하고 있기 도하다. 기원후 3세기 경은 지형적으로 언어적으로 캄보디아와 연관되어지며, 크메르 제국 계승자의 최초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중국의 기록에 나타난 동남아 지역의 최초 인도화된 정착지인 푸난(Funan)은 중국어의 브남(扶南:bnam)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프놈(Phnom, '언덕'이란 의미의 현재 크메르어)으로 발음되는 '산'이란 의미의 고대 크메르 단어와 일치한다.
해상무역을 기반으로 번영했던 푸난은 5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4세기경 중국인들이 동남아 무역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되면서 인도네시아 지역, 특히 수마트라 해안의 무역중심지들과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역이 발달하게 되었고, 이로써 푸난의 중계무역지로서의 위치가 퇴색된 것에 기인했다. 푸난의 멸망의 직접적 원인은 6세기 중엽 내란으로 약해진 푸난에 대한 첸라 왕국의 공격이었다. 현 캄보디아의 모체로 간주되는 첸라는 6세기에 크메르족이 메콩강 중류 지역에 세운 왕국으로서 참파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던, 푸난의 속국이었다. 푸난을 공격한 바바바르만(Bhavavarman)은 푸난의 왕인 류드라바르만(Rudravarman)의 손자로서 첸라의 한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첸라의 왕이 되었다(조흥국, 2002). 푸난은 캄보디아 최초의 왕국이자 동남아시아 최초의 제국이었다.


나.첸라왕국(眞臘)시대 (535년-802년)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6세기의 전반부는 젠라(Zhenla, 또는 첸라 Chenla)로 불리는 왕국이 나타났는데 현재의 남동부 라오스 지역의 메콩강에 위치한다. 첸라는 푸난의 통제권을 장악해 영토를 현재의 베트남 남부에서 중국 남부까지 확장했다. 8세기경 상 첸라와 하 첸라로 나뉘어 지고 하 첸라는 수 개의 작은 속국들을 통합하고 있었는데 속국 중에는 메콩 지역에 있던 푸난도 속해있었다. 푸난의 캄보디아 역사에서 전 앙코르시기로 기록되어지는 9세기 초기에 멸망한다.


다 .앙코르 왕국 시대(802-1432년)
세계7대 불사사이중의 하나인 앙코르 유적으로 유명한 왕코르 왕국은 지금의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남부 베트남, 말레이와 미얀마의 일부 그리고 인도양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한 대 제국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위대했고 문화적으로 가장 찬란했던 12세기경부터 동시에 당시 크메르인들의 철천지원수였던 타이족(태국)과 참인들과의 전쟁기간이었다. 이미 1177년에 참인들에 의해 앙코르시는 파괴되었었고, 타이인들은 1353년과 1430년에 앙코르를 정복하였다. 이때 시는 잿더미가 되었고, 기술자와 학자 등이 태국으로 노예로 끌려가 태국문화의 캄보디아 화가 시작 되었다. 1432년에 파괴되었고 열병이 창궐했던 앙코르는 포기되어져야 했다 (오스카 베겔 1997). 그 후 400년간 정글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인 혼란한 상황에서 북쪽에서 중부로 밀고 내려온 베트남의 남진이 가속화되어 캄보디아왕국은 베트남이라는 또 하나의 강력한 힘에 의해서 계속 정복당하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4. 과도기
13-19세기 중엽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의 관계) 앙코르 왕국의 속박 하에 있었던 태국들은 13세기 중엽 군사적인 저항을 통해 캄보디아인들의 지배를 벗어나 수코타이왕국을 세웠다. 아유타야 왕조(1351-1767)에 들어서서 타이인들의 캄보디아인들에 대한 공격은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바와 같이 앙코르 왕국은 1431년 타이인들의 대규모 군사적 공격을 받아 무참히 파괴되었다. 1431년 앙코르 정복의 직접적 효과는 무엇보다도 아유타야 정부가 나콘 랏차시마(Nakhon Ratchasima)를 중심으로 한 코랏 고원의 넓은 지역을 직접적인 지배 하에 둘 수 있었다는 것으로, 이 지역은 그 후 이산(Isan) 지역으로 알려진 태국의 일부로 고착되어 발전되었다(조흥국, 2002).
16세기 초에는 캄보디아의 한 왕자가 왕위찬탈자를 축출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 위해 아유타야에게 군사적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후 캄보디아 왕위계승 분쟁에서도 여러 왕자들이 이 선례를 좇아 태국에게 의지했고, 그렇게 세워진 캄보디아 정부는 태국의 지배하게 있었다. 그리하여 아유타야 왕국의 왕들은 종종 캄보디아를 태국의 속국으로 간주했다(조흥국, 같은책).
캄보디아에 대한 태국의 이러한 일방적 관계는 17세기에 들어서서 후에(Hue)를 수도로 한 베트남의 응웬 정부가 그 세력을 메콩델타 지역으로 확대하기 시작하면서 캄보디아에 대한 태국과 베트남의 경쟁관계로 발전했고, 이것은 그 이후 대륙 동남아에서 국제관계의 한 중요한 구도가 되었다. 캄보디아에 대한 베트남의 영향은 1620년경 응웬 가문의 한 공주가 캄보디아의 처이쳇타(Chey Chettha Ⅱ, 재위 1618-1628) 왕의 왕비가 됨으로써 처음으로 심겨졌다. 당시 남부로의 확장을 기도하고 있었던 후에 정부의 통치자인 사이 왕(Sai Vuong, 재위 1613-1635)은 자신의 사위인 처이쳇타에게 메콩강 델타 지역에 베트남인들의 정착촌을 세울 권한과 이 촌락들을 유지키 위해 쁘레이꼬(Prey-kor, 현 사이공 지역)에 세관을 설치할 권리를 요청했다. 캄보디아 왕은 이 요구를 들어주었는데, 이로써 베트남인들이 오늘날 메콩강 델타 지역을 차지하게 된 역사적 바탕이 제공된 셈 이었다(조흥국, 같은책).
17세기 중엽 캄보디아를 둘러싼 태국과 베트남간의 알력은 이후 삼국간의 관계에서 빈번하게 나타났는데, 여기에는 캄보디아 왕실 및 관료사회 자체 내에서 친 베트남과 친 태국의 상호 적대적인 두 개의 파벌이 형성되어 각각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벌인 경쟁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특히 1670년대 초부터 1680년대 말까지 지속된 왕위계승 분쟁에서 태국과 베트남은 캄보디아에서의 우세한 위치를 두고 처음으로 직접적인 충돌을 갖게 되었다. 이 두 왕국은 캄보디아에서 자신들의 상호 이해관계가 한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지 않은 균형관계에 있는 것에 신경을 썼던 것처럼 보인다. (조흥국 , 같은책)
메콩강 델타 지역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적극적인 진출은 18세기에 들어서서 더욱 현저해졌다. 응웬 정부는 현 사이공 일대인 자딘(Gia-dinh)과 빈화(Bien-hoa)를 근거로 베트남의 지원을 받으면서 캄보디아 정부에게 대항하고 있던 캄보디아의 왕자가 1691년에 죽자, 위 지역에 베트남인 관리를 파견했으며 1698년에는 베트남인들을 정착시켜 베트남 지방으로 만들어 버렸다. 1731년에는 메콩강 델타 지역에 정착한 베트남 주민들이 캄보디아인들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후에 정부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군대를 파송하여 캄보디아 정부를 위협하자, 캄보디아 정부는 이에 굴복하여 미토와 빈롱 지방을 할양했다. 캄보디아의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서 베트남인들의 캄보디아 조정에 대한 압박이 가중되었던 1750년대 말에는 짜우독(Chau-doc), 사덱, 속짱, 짜빈(Tra-vinh)등이 베트남인들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18세기 전반의 이러한 과정을 통해 메콩강 델타지역이 베트남의 영토가 되었던 것이다. (조흥국, 같은책)
181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캄보디아에 대한 베트남의 간섭은 캄보디아인들을 베트남에서의 부역에 동원하기까지에 이르렀고, 특히 1834년 베트남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짠이 죽자 그의 딸인 메이(Mei, 재위 1835-1841)를 캄보디아의 왕위에 앉힌 베트남 정부는 그 해부터 캄보디아를 베트남 화하는 본격적인 제국주의적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캄보디아의 모든 주요 지명들을 베트남 식으로 개칭했으며, 인사, 군사, 재정 등을 포함한 정부의 모든 중요한 행정결정들을 베트남인들이 통제했다. 베트남의 이러한 정책은 캄보디아인들의 광범위한 반베트남 저항운동을 야기하여, 1840년경에는 캄보디아의 왕실연대기가 '모든 대신들, 지방의 관리들, 그리고 평민들이 베트남인들을 죽이기 위해 힘을 모으기로 합심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저항운동이 절정에 달했다(조흥국, 같은책). 태국왕국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캄보디아에서의 위치를 회복하기 위해 원정군을 파견했다. 캄보디아인들의 반란과 태국 군대의 공세에 직면한 베트남 정부는 결국 1845-46년 태국과 협상할 수밖에 없었고, 그 협정에 따라 1848년 태국 정부가 지지하는 두영(재위1848-1860)이 캄보디아의 새로운 왕으로 인정되었다. 이로써 캄보디아는 다시 태국의 우세한 영향 하에 놓이게 되어, 태국으로는 매년, 베트남으로는 3년에 한 번씩 조공을 보내게 되었다. 태국의 우세한 위치는 1863년 캄보디아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프랑스가 1893년 전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였고 그 과정에서 베트남이 남진정책으로 확장 시켜놓았던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영토를 일부 반환시켜주고 지금의 베트남 영토가 형성되었다(황귀연, 1999).

 

5. 베트남의 남진 역사
베트남에서 명나라가 철수한 뒤에 베트남에는 반명투쟁의 지도자 였던 레 러이가 레 왕조를 세우고 360년이란 긴 역사동안 존속했다. 그러다가 16세기 초 막씨(莫)가 제위를 찬탈했고, 막씨가 쫓겨난 다음 찐(鄭 )씨 가문과 응웬(원)씨 가문이 쭈어(主)라고 불리면서 왕조를 두개로 분열하였다. 그리고 레씨는 겨우 황제의 이름만 지켰다. 찐씨는 하노이를 중심한 북쪽을 그리고 응웬씨는 참파의 위쪽에 위치한 중부를 근거지로 대립하고 있었다. (유인선, 2002)
19세기 이전 베트남의 역사는 '북거'(北拒)와 '남진'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이처럼 남으로의 진출, 더 정확하게 말해 '팽창'은 베트남 역사에서 북쪽 중국의 침입에 대항하는 것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참파는 중국 지배의 초기부터 1470년 레 왕조 타인 똥의 원정 이전까지 끊임없이 베트남의 남쪽 변경을 침입했다. 그러다가 타인 똥의 원정 이후 베트남의 속국이 되었다(유인선, 같은책).
실제로 베트남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중부 해안선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는 길밖에 없었다. 북에는 중국이 있고 서쪽은 산간지역에다 말라리아가 극성이었고 동쪽은 바다로 막혀 있기 때문이다. 응웬 호앙은 군사력의 열세로 인해 북의 권력을 탈환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이제부터는 남쪽에서의 기반을 확실히 다지고자 했다. 1653년 위협을 느낀 참파가 푸옌을 침범하자, 당시 응웬씨의 집권자였던 응웬 푹 떤(Nguyen Phuc Tan, 1648-1687)은 3천 명의 병사를 일으켜 참파 군을 격파하고, 판랑(Phan Rang) 강까지 진출하여 카우타라를 정복하고 그곳에 2개 부를 설치했다. 이처럼 응웬씨의 영토가 오늘날의 칸 화(Khanh Hoa) 성(省)을 넘어 판랑까지 확대되자 참파는 판리(Phan Ri)로 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인선, 같은책).
응우엔씨는 참파를 남으로 계속 압박하기 보다는, 우선 점령지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고자 주민들을 이주시켜 이들로 하여금 토지를 개간하고 촌락을 이루도록 독려했다. 인력과 물자가 크게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1627년부터 시작된 찐씨의 침입을 몇 차례 성공적으로 막아낸 응웬씨는 이제 북에 대한 두려움이 반감된 상황에서 남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진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648년 응웬씨가 찐씨의 군대를 대파한 후 2만여 명의 포로들을 꽝남의 북쪽 탕호아(thang Hoa) 부(府)는 물론 남쪽 푸옌 부까지 이주시킨 것은 이런 의도를 보여준다. 이들 지역은 참파의 고토(故土)로서 인구가 희박한 곳이었다. 응우엔씨는 포로를 50명 단위로 조를 짜서 식량과 농기구 및 가축 등을 주고 정착시킨 다음 일정기간이 지나면 호적에 등재시켰다. 이로써 비로소 탕 호아 부에서 푸옌 부까지 베트남인 촌락들이 서로 이웃하게 되었다(유인선, 같은책).
응웬씨는 판리의 참파에 관심을 갖기 전 지금의 사이공 지방으로 진출할 기회를 맞이했다. 응웬씨는 일찍부터 남부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무렵부터 남북 대립의 피해자인 베트남인 범죄자· 빈민· 부랑자들은 동나이(Dong Nai, ,지금의 빈화(Bien Hoa)와 모이 쑤이(Moi Xui, 지금의 바리아〔Ba Ria〕즉 붕타우지역)등지를 중심으로 캄보디아인과 더불어 살며 토지를 개간했다. 응웬씨가 이 지역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계기는 1658년 캄보디아 궁중의 내분을 빌미로 군사 개입을 하면서부터였다. 응웬씨는 군대를 보내 이등해 왕을 포로로 잡고 도읍인 우동(Oudong)을 약탈했다. 응웬씨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앙 수르(Ang Sur, 1659-1672)는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했고, 응웬씨는 베트남인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한층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메콩강 하류지역은 캄보디아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이를 가속화시킨 것은 중국인 이주민들이었다(유인선, 같은책).

 

6. 베트남 남진의 중국인 역할
응웬씨가 메콩강 하루지역에 진출하는 데는 중국인들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었다. 중국인들의 역할은 두 시기로 나누에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명의 유장(遺將) 양옌디 등이 메콩강 하류에 정착한 기기이고, 두 번째는 막씨( 氏)가 하띠엔(Ha Tien) 지방을 개발한 시기이다. 1679년경 명의 유장이라고 자칭하는 양옌디와 천상촨(陳上川)등이 병사 3천명을 이끌고 다낭에 이르러 신하되기를 청했다. 응웬푹 떤의 조정은 논의 끝에 이들을 이용하여 앙난이 지배하고 있던 캄보디아의 동부를 개척하기로 결정하고 양옌디 등은 미토(My Tho 美湫)에 천상찬등은 빈화에 정착시켰다. 이들을 통해 우동의 자야제타 3세를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캄보디아의 자야제타 3세가 요새를 구축하고 응웬씨에 대한 조공을 거부했으며, 응웬씨는 자야제타 3세에 대한 원정을 구실로 1688년 출병하여 프놈펜을 점거했다. 응웬씨 군대는 자야제타 3세의 조공을 약속받고 일단 철병했으나(1689),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1690년 다시 출동하여 캄보디아를 복속시켰다.(유인선, 같은책)
17세기 말 남부의 서쪽 변경 하띤에서는 또 다른 중국인 막끄우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응웬씨가 이 지역을 점유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막끄우는 광둥의 레이저우 출신으로 명의 멸망 후 청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1671년 캄보디아로 이주했다. 그는 캄보디아 궁중에 출입하며 왕으로부터 신임을 얻은 후 무역을 관장하는 관직에 임명되었다. 막끄우는 베트남 남서부에서 캄보디아 남부지역을 자신의 통제 아래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1735년 막끄우가 사망하자 아들 막티엔 뜨(Mac Thien Tu)가 뒤를 이어 하띤을 다스렸다. 그 역시 이듬해 응웬씨로부터 도독의 관직을 받고 자치를 행했다. 응웬씨는 그에게 세금을 면제해 주고 대외무역을 위한 독자적 화폐주조권도 인정해 주었다(유인선, 같은책).
반면 태국왕국이 미얀마로부터 침입을 받아 혼란한 틈을 타 응웬씨는 1757년 다시 깜폿으로부터 까마우에 이르는 타일랜드 만 연안의 모든 지역에 대한 공식 지배권을 캄보디아로부터 넘겨받아 막티엔 뜨에게 관할케 했다. 이것 역시 왕위에서 쫓겨난 캄보디아 왕이 하띤으로 피신하여 막티엔 뜨의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결국 막씨 부자의 도움으로 응웬씨는 남부의 서부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유인선, 같은책).
응웬씨가 남부지방으로 진출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곳이 넓은 평야지대였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잠재적 생산력은 홍강 델타에 경제적 기반을 둔 북쪽 찐씨에 비해 경제력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던 응웬씨에게 큰 매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캄보디아 내정에 간여하여 영토를 할양받은 응웬씨는 이 지역 개발에 열성을 보였다(유인선, 같은책).
남부 개척지에 대한 정착사업은 처음 중국인들에게 맡겨졌다가 곧 응웬씨 조정에 의해 점차 조직적인 방법으로 행해졌다. 중부지방의 가난한 농민들을 이주시켰는가 하면, 전쟁이 끝나자 불필요하게 된 병사들을 동원해 촌락을 건설하고 생활하게 했다. 응웬 왕조(1802-1945)의 기록에 의하면 이런 정착화는 비교적 자유로운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주민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곳에 정착하여 생활하면서 새로운 토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을 수가 있었다. 조세와 요역은 일정 기간 동안 면제되었으며, 관리나 대지주에 의한 착취 또한 북쪽의 찐씨 치하에서보다 확실히 덜했다 (유인선, 같은책).

 

7. 베트남인의 영토와 거주 확장 방식
이미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접수한 메콩델타 지역이지만 이곳은 크메르인들이 오랫동안 정착하여 광범위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베트남인들이 메콩강 델타 지역을 정복하고 자신들의 정착지로 만드는 데 사용했던 가장 중요한 방식은 운하를 파고 돈디언(don dien屯田)을 설치한 것이었다. 돈디언은 베트남 정부가 50명 단위의 주민들에게 변경 지역에서 불하한 토지를 일컫는 것으로서, 다른 지역의 주민들을 이주시켜, 주민들은 이 땅에 대해서 7년 동안 세금을 내는 부담과 함께 그 지역을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는 군사적 의무를 가졌다. 19세기 초에 편찬된 『자딘통찌』에 의하면, 코친차이나 지역으로의 영토적 팽창을 위해 응웬(Nguyen) 정부는 베트남의 중부 지역으로부터 평민들, 특히 유량민 들을 모아 남부 지방으로 보냈다. 목표는 이들로 하여금 땅을 개간하여 농토를 일구고 그곳에 정착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이 돈디언 체제를 통해 베트남인들은 라익(rach) 즉 하천의 지류들을 따라 수로의 교차점들에 정착하여 점차 캄보디아인들을 몰아내고 메콩델타 지역의 새로운 땅 임자가 되었으며, 그것은 베트남 정부로서는 새로운 영토의 획득을 의미했다(조흥국, 2002)
최초의 돈디언은 1790년 캄보디아인들과 떠이선(Tay Xon)반란자들로부터 응웬이 베트남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건설되었다. 떠이선 반란이 진압되고 1802년 응웬 왕조가 세워진 이후에는 돈디언은 주로 캄보디아인들에 대항하여 세워졌다. 예컨대 민망(Minh Mang)황제의 통치 기간(1820-1842) 캄보디아에 대한 팽창정책이 추구되었고, 이것은 1838년부터 캄보디아인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캄보디아인들의 반란이 완전히 종식된 이후에도 잠재적인 위협을 막기 위해 돈디언들을 계속 유지하거나 새로 건설했으며, 특히 캄보디아인들의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에 집중적으로 세워졌다. 프랑스인들이 1867년 이곳에 왔을 때 롱수엔(Long Xuyen)에만도 약 10개의 돈디언이 있었다(조흥국, 2002).
하천과 지류 그리고 오직 운하를 통해서만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가능한 메콩강 델타 지역에서 수로의 중요성은 프랑스인들에게도 처음부터 인식되었다.
1908년 라익쟈(Rach-gia), 바삭 롱미(Bassac-long My), 사노(Xa-no)등에 3개의 운하가 완성되었는데, 이들은 1930년까지 다른 수로들과 연결되어 메콩델타 전역에 걸쳐 바둑판과 같은 수로체계를 이루게 되었다. 1930년에는 라익쟈와 하띠엔을 연결하는 운하가 완공되었다. 총 81km의 길이에 3.5m 깊이로 파진 이 운하는 식민 시대에 마지막으로 건설된 운하였다. 운하를 파고 유지하는 데는 상당한 노동력이 필요했는데, 이것은 강제 징발된 부역에 의해 조달되었다. 특히 운하를 유지하기 위해서 1884년에 준설선이 도입되었고 1890년대부터 델타 지역의 운하들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도로들은 운하들을 따라 놓여져 있으며 특히 건터, 롱수엔, 속짱, 박리우(Bac-lieu)등의 주요 마을들과 델타 하류 지역에 집중되어있다.(조흥국,2002)
결국 베트남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메콩델타를 캄보디아로부터 얻어냈지만 그곳에 광범위하게 살고 있는 크메르인들을 쫓아내고 그곳에 자국민을 살게 하여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메콩델타의 광범위한 지역 중 가장 기름지고 농사하기 좋은 곳을 택하여 확장하기 시작했으며 그 땅은 대부분 크메르인이 이미 정착한 곳이었다. 그러기에 돈디언의 방식과 이를 보호하는 세금, 그리고 수로를 만들고 운하와 하천을 따라 길을 내는 방법으로 확장해 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주민인 크메르인들을 흩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참(Cham)인들도 베트남의 남진으로 중부에서 남쪽으로 밀려나 참인 일부가 지금의 짜우독 일대 국경지역에 살고 있다.
중국인들도 베트남인들이 메콩델타 일대를 베트남 화 하면서 그 힘을 잃어가고, 크메르인은 흩어진 소수종족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서로의 종족성에 영향을 주면서 다문화를 이루어 왔다. 이러한 종족간 상호 교류를 통하여 공생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족집단들은 동화 보다는 각자의 종족성을 뚜렷하게 유지해 왔다(하순, 2002). 베트남정부의 소수종족에 대한 정책이 원칙적으로는 같은 동포로 부르면서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어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많은 경우 이것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베트남의 국민들(킨족) 조차 제대로 의식하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토지문제나 경제적으로 그리고 교육과 취업문제에 이르기까지 차별정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소수종족들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정체성을 더 확실하게 드러내게 하였다

 

8.남진 역사과정의 크메르인
크메르인에 대한 베트남의 정책은 아주 강력한 동화 정책을 써서 지역간, 문화간의 경계를 없애고 베트남식 옷과 말을 쓰게 하였다. 그리고 행정조직의 조정을 통하여 크메르인을 흩어놓아 베트남인들과 섞여 살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연적으로 상호 종족간의 결혼을 통해 베트남 화하려고 하는 적극적인 방법을 택하였다. 다른 어떤 소수 종족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동화를 이끌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효과이지 속으로는 더 강력한 종족성을 갖게 하였다. 오히려 서로간의 갈등이 고조되어 한 때는 크메르인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게 하였다. 1841년부터 시작된 메콩과 캄보디아에서의 반란은 베트남의 남진 과정 속에서 그동안의 갈등 속에 터져 나온 감정의 표출이었다. 이것은 베트남인들이 맞은 최후의 민족간의 충돌이었다. 천년간 지속된 남진의 마지막 충돌을 끝으로 메콩델타를 베트남 화 하였다.(최병욱 2000)
크메르인 어린이들은 베트남학교에 입학하여 베트남어로 교육을 받게 되어있다. 그러나 많은 아이들이 가난으로 학교를 가지 못해 오히려 베트남어나 크메르어 모두 문맹자로 남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크메르인 집중지역에는 예외 없이 크메르사원이 있어 그곳에서 크메르어를 가르치지만 이것역시 체계적이지 못하고 일부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금도 베트남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크메르인들이 약40-50%이상 이고, 크메르어는 거의 100% 구사하지만 쓰지못하는 크메르인이 약80%에 이른다.
특별히 토지문제에서 많은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다. 원래 메콩델타의 크메르인들은 좋은 땅은 다 빼앗기고 건조하고 염분이 많은 농사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땅에서 살게 되었다. 공산화 과정 속에서 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 80년대 수많은 베트남인들이 해외로 탈출(보트피플로 알려진)할 때 그 속에는 크메르인도 많이 속해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배고픔과 차별정책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크메르인이 집중적으로 사는 지역에 가면 광활한 대지에 아름다울 정도로 논에 벼들로 가득차있다. 그래서 여행객들은 감탄을 한다. 그리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살기 좋은 곳이라고 느끼고 최소한도 먹을 것은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지금도 시골의 크메르인 20%정도의 사람들이 절대 빈곤에 있으며(쌀이 모자란다), 절반이상이 밥과 늑맘(한국의 젓갈 간장)으로만 끼니를 때우는 때가 허다하다. 이러한 이유는 크메르인 대부분은 땅이 없거나 기름진 땅이 없어 소작농을 하거나 고기를 잡거나 잡다한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 쌀 수출 2-3위라고 자랑하는 베트남의 최대의 곡창지대에서 지금도 크메르인은 1Kg에 200원 이하인 쌀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어려움은 오히려 크메르인들에게 더 응집력을 주고 그들 종족단위로 생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짜빈성의 경우(한국의 도에 해당)140여개의 크메르사원(집한 채 짓고 불상을 가자놓은 정도의 규모가 아니라 전통적인 규모를 갖춘)이 있고 그 사원을 중심으로 크메르인들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군에 해당하는 짜꾸 현의 경우, 50여개이상의 사원과 주민중 80%(주민들의 통계)의 크메르인들이 집중해서 살고 있다. 도로 안으로 들어가면 대부분의 마을은 90%이상이 크메르인들이다. 속짱성의 경우도 비슷하며 속장시는 크메르인의 중심도시로 외부에 알려져 있다.
오늘날 캄보디아에 거주하는 크메르인들보다 메콩델타에 거주하는 크메르인들이 더 많은 전통문화의 요소들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오히려 베트남의 차별적 상황 그 자체에 의해 '종족경계'(Barth 가 말하는)가 생겨나고 따라서 크메르인의 실체도 더 뚜렷이 식별 되어지게 된 이유일 것이다(하순 2002).
반면에 중국인의 경우는 그들의 종족성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자원획득의 경쟁에 있어서 타 종족 집단보다 더 많은 이익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지배종족인 베트남족 과의 관계는 동화보다는 오히려 대립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하순, 같은 책) 이것은 같은 장소에 있는 크메르인과 중국인의 상반되는 역사적인 상황이다.
 

 

 

9. 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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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의 남진을 통해서 베트남의 기질을 한 가지 추론할 수 있다. 베트남인들이 어떤 대상을 대하는 표현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이나 중국, 그리고 프랑스를 대하는 표현방식은 항쟁과 방어이지만 과거 남진을 통해 속하게 된 많은 소수부족에 대한 표현방식은 정복과 복속이다. 왜 베트남인들이 외국인에게는 물건값을 더 받는 것이 당연시되고, 빼앗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것은 조금이라도 빼앗긴다고 생각하면 집단적인 동의와 반발이 즉각적으로 일어나는지, 역사를 통해 베트남의 이중성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부지방에 속한 사이공의 역사박물관에 가면 하노이 중심의 유물과 참파중심의 유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정작 동남아 최초의 왕국에 대한 역사자료는 너무나 미약하게 보인다. 참파왕국이 없어진 역사적 존재로 인식되는 반면, 크메르 왕국은 아직도 남아있는 남진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베트남 내의 크메르인은 아직도 감추어진 종족이라 할 수 있다. 베트남의 크메르인은 정치, 사회, 교육, 경제 등 모든 영역에서 소외 받았었다. 그리고 크메르인의 선교사역의 경우 캄보디아 내의 크메르인에게 집중이 되어있다.
베트남 내의 크메르인은 사회주의의 체제하에 공산당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영향력과, 효율적인 관리를 하는 지방자치의 감시망 속에 갇혀있고, 가장 복음화가 진척이 없는 소승불교(상좌불교)의 풍속을 유지하고 있고(크메르인 집중지역은 사원을 중심으로 한 사회의 강한 결속력을 유지하고 있다),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정부에서 크메르인에 대한 외부의 접근을 막고 있고, 또 아직도 메콩델타의 베트남화 과정의 역사가 짧아 크메르인에 대해 확실하게 안심을 못하는 안보적인 측면에서 베트남의 크메르인에 대한 선교적인 장벽이 뚫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최근 2-3년 사이에 크메르인 속에서 강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오히려 베트남 정부와 교회가 이런 변화를 아직 받아줄 준비가 되지 못하고 있다. 2000년 까지 여러 선교기관의 데이터 가운데 베트남 내의 크메르인에 대한 데이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에 데이터가 나오지만 역시 이것은 간접적인 것이지 직접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베트남인들의 보고체계가 실제와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결론이나 방향을 제시하기 보다는 베트남 내의 크메르인들의 존재와 역사성을 이해하기 위한 글이다. 왜 베트남 내의 크메르인이 메콩델타의 역사성에서 중요한 위치를 찾지 하면서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외면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면서, 복음에서 조차 외면되는 거대한 소수종족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는 동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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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Webzine MIR 2003년 3월호 Index ]